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방식에는 묘한 특징이 있다. 일본 정부는 독도가 역사적으로 자국의 고유영토라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1905년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통해 독도를 영토로 '편입'하였다는 사실을 법적 근거로 함께 내세운다. 언뜻 보면 두 가지 근거를 겹쳐 주장함으로써 논거를 강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두 주장은 보완 관계가 아니다. 둘은 서로의 전제를 부정하는 구조적 모순 관계에 있다. 이 글은 그 모순이 무엇인지를 논리적으로 해명하고, 나아가 일본이 무주지(無主地)라 전제한 1905년 당시 독도가 이미 대한제국의 관할 아래 있었음을 보여주는 칙령 제41호(1900)의 법적 의미를 분석한다. 그리고 칙령에 등장하는 '석도(石島)'를 독도가 아닌 관음도라고 주장하는 일본 측 반론을 검토하고, 그 주장이 왜 성립하지 않는지를 살펴본다.
고유영토설의 핵심은 단순하다. 독도는 다른 나라 영토였던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처음부터 일본의 땅이었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늦어도 17세기 중반에는 독도에 대한 영유권 의식이 확립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주장이 국제법상 의미를 가지려면 단순한 역사적 인식의 존재만으로는 부족하다. 국제사법재판소(ICJ)의 판례가 일관되게 요구해온 기준에 따르면, 영토 귀속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계속적이고 평화적인 실효지배, 즉 국가가 해당 영토에 대해 지속적으로 행정 행위를 수행해왔다는 구체적 증거가 필요하다. 막연한 인식이나 어민의 왕래만으로 영토 주권이 성립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고유영토설의 치명적 문제는 증거의 빈약함에만 있지 않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일본이 고유영토설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1905년 편입을 근거로 함께 내세운다는 점에 있다. 고유영토설은 독도가 1905년 이전에도 이미 일본 영토였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1905년의 편입 조치는 무엇인가. 이미 자국 영토인 땅을 다시 자국 영토로 편입한다는 것은 법적으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오히려 편입이라는 행위의 존재 자체가, 그 이전에는 자국 영토가 아니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1905년 1월 일본 각의는 독도를 '다케시마'로 명명하여 시마네현에 편입하기로 결정하였고, 같은 해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통해 이를 공표하였다. 일본은 이것이 근대 국제법의 원칙인 무주지 선점에 따른 정당한 영토 취득이라고 주장한다. 무주지 선점이란, 어떤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 땅을 먼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그 의사를 공식 표명함으로써 영토로 취득하는 행위다. 이 논리가 성립하려면 세 가지 전제가 충족되어야 한다. 해당 영토가 실제로 무주지여야 하고, 선점 의사가 공식적으로 대외에 통고되어야 하며, 실효적 지배가 수반되어야 한다. 시마네현 고시는 이 세 가지 모두에서 문제를 드러낸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독도가 무주지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대한제국은 1900년 칙령 제41호를 통해 독도를 울도군의 관할 도서로 명시하였다. 이미 타국의 유효한 국가 행위에 의해 관할이 설정된 영토는 국제법상 선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일본의 편입론은 그 전제 사실부터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고시의 법적 성격이다. 시마네현 고시는 일본의 한 지방 행정단위가 발령한 내부 행정고시다. 국제법상 선점의 통고는 관계국에 외교 경로를 통해 공식적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본은 이 사실을 대한제국에 통보하지 않았다. 지방 관보에 게재된 행정고시를 국제법상 유효한 영토 취득의 공시(公示)로 볼 수 없음은 분명하다. 세 번째 문제는 시기다. 시마네현 고시가 발령된 1905년은 을사늑약 체결(1905년 11월) 직전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의 강압 아래 외교권을 빼앗겨 가던 시기였다. 국제법은 강박에 의해 이루어진 행위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설령 한국이 이의를 제기하려 했더라도 그럴 수 있는 외교적 통로 자체가 막혀가던 상황이었다. 결국 시마네현 고시의 편입론은 독도가 무주지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지만, 그 전제 자체가 칙령 제41호에 의해 부정된다. 그리고 고유영토설은 편입이 불필요하다는 결론을 낳음으로써 편입론의 존재 이유를 지운다. 일본의 두 주장은 각자가 상대방의 논리적 기반을 허무는 구조 속에 놓여 있다.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은 칙령 제41호를 반포하였다. 내용은 울릉도를 울도(鬱島)로 개칭하고, 울도군수의 관할 구역을 울릉전도, 죽도(竹島), 석도(石島)로 명정하는 것이었다. 이 문서는 한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우선 이 칙령이 시마네현 고시보다 법적으로 우월한 근거가 되는 이유를 짚어야 한다. 칙령은 국가 최고 수준의 입법 행위다. 황제가 반포한 규범으로서, 지방 행정단위인 현(縣)의 고시와는 규범의 위계 자체가 다르다. 또한 칙령 제41호는 관보에 공포되어 국내외에 공식적으로 공시되었다. 국제법이 영토 귀속의 증거로 중시하는 실효적 지배의 요건, 즉 행정 구역 획정과 군수 임명이라는 구체적 국가 행정 행위를 수반하였다. 시간적으로도 칙령은 결정적이다. 1900년의 칙령은 1905년 시마네현 고시보다 5년 앞선다. 이 시간적 선행성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이 1905년 독도를 무주지로 상정하고 선점하였다고 주장하는 시점 이전에, 이미 대한제국이 유효한 국가 행위를 통해 독도를 관할 도서로 명시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일본 편입론의 핵심 전제인 무주지 개념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1906년의 기록은 이 관할 관계가 실제로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그해 일본인들이 울릉도를 방문하여 독도가 일본 영토가 되었다고 말하자, 울도군수 심흥택은 곧바로 강원도 관찰사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그 보고서에서 심흥택은 독도를 '본군 소속'이라고 명시하였다. 이것은 칙령 제41호 이래 울도군이 독도를 자신의 관할로 인식하고 행정적으로 관리해왔다는 직접적인 증거다.
칙령 제41호의 법적 효력을 무력화하려는 일본 측의 시도 중 하나가 '석도'의 비정 문제다. 칙령에 등장하는 석도가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 인근의 관음도(觀音島)를 가리킨다는 주장이다. 관음도는 울릉도 북동쪽 해안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작은 섬으로, 실제로 돌이 많아 일부 문헌에서 석도로 불린 사례가 있다는 것을 근거로 든다. 이 주장은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이나, 지리적·언어학적·행정적 맥락을 종합하면 설득력을 잃는다. 지리적 맥락부터 살펴보면, 관음도는 울릉도 본도와의 거리가 불과 100여 미터에 불과하다. 썰물 때에는 걸어서 건너갈 수 있을 정도다. 이 정도의 거리라면 관음도를 울릉도와 별개의 독립된 도서로 행정 구역에 명시할 이유가 없다. 칙령이 울릉전도와 나란히 죽도, 석도를 열거한 것은 울릉도로부터 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어 독립적인 행정 관리가 필요한 도서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관음도는 이 맥락에 맞지 않는다. 언어학적으로도 관음도 비정설은 근거가 약하다. '독도'라는 명칭의 기원을 보면, 전라도 방언과 울릉도 지역어에서 '돌'을 뜻하는 말이 '독'이다. 이 '독'을 한자로 표기할 때 소리를 따라 적으면 '獨(독)'이 되고, 뜻을 새겨 적으면 '石(석)'이 된다. 즉 독도(石島)의 '석'은 '돌섬', '독섬'이라는 지역 발음을 뜻으로 옮긴 훈차 표기다. 이 언어적 연결 고리는 '독도 = 석도'라는 등식의 핵심 근거가 된다. 반면 관음도가 역사적으로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독섬'으로 불렸다는 언어적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관음도는 '깍새섬'이라는 별칭으로 불렸을 뿐이며, 이것은 '석도'와의 언어적 연결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행정적 맥락에서도 관음도 비정설은 무너진다. 앞서 언급한 1906년 울도군수 심흥택의 보고서를 다시 보면, 그는 일본인들이 '독도'를 일본 영토라 주장한다는 사실을 보고하면서 독도를 '본군 소속'이라 하였다. 만약 칙령의 석도가 관음도를 뜻하는 것이라면, 울도군수는 자신의 관할 도서로 독도가 아닌 관음도를 인식하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심흥택은 독도를 당연히 자신의 관할로 여기고 있었다. 이 사실은 칙령이 의도한 석도가 독도였음을 행정 실무의 차원에서 방증한다. 게다가 관음도는 1882년 울릉도 수토(搜討) 당시의 기록과 이후 각종 지리지에서 이미 별도의 명칭으로 존재가 확인된다. 하나의 섬이 동일 시기 문헌에서 관음도와 석도라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 혼용되었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 입증 책임이 무겁다. 반면 독도가 '독섬 → 석도 / 독도'로 이표기되었다는 설명은 언어의 음차·훈차 변환이라는 일반적 원리로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요컨대 관음도 비정설은 석도라는 명칭의 표면적 유사성에 기대면서, 지리적 상식과 언어학적 맥락, 행정 실무 기록 전체를 거슬러야만 유지될 수 있는 주장이다. 증거의 무게는 압도적으로 석도를 독도로 보는 쪽에 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구성하는 두 기둥, 고유영토설과 시마네현 고시 편입론은 각자가 상대방의 논리적 전제를 부정한다. 고유영토설이 맞다면 편입은 불필요하고, 편입이 필요했다면 고유영토가 아니었다는 것이 된다. 이 구조적 모순은 일본이 두 주장을 사실에 근거한 법적 논증으로 구성한 것이 아니라, 어느 하나가 부정될 경우를 대비하여 전략적으로 병렬 배치한 것임을 시사한다. 반면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는 법령의 위계, 공시성, 시간적 선행성, 실효지배의 구체성이라는 측면에서 국제법이 요구하는 영토 귀속의 요건을 두루 충족한다. 이를 무력화하려는 관음도 비정설은 지리적·언어학적·행정적 증거 앞에서 설득력을 잃는다. 결국 논리의 일관성과 증거의 무게는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일본의 주장은 스스로의 내부에서 모순을 생산하고, 한국의 주장은 그 모순을 외부에서 확인한다.
*하단의 이미지는 당시 칙령과 고시의 위치 비교를 이해하기 쉽게 피라미드 형식으로 시각화한 것입니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는 크게 세 가지다. 앞서 살펴본 고유영토설과 시마네현 고시 편입론,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러스크 서한이다. 일본은 이 두 문서를 묶어서 "전후 국제질서를 확정한 평화조약에서도 독도는 일본 영토로 확인되었다"는 논리를 구성한다. 이것은 앞의 두 주장이 역사와 국내법 차원의 논거였다면, 국제법과 전후 처리라는 차원에서 영유권을 뒷받침하려는 시도다. 그런데 이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당시의 외교적 맥락, 조약 초안이 어떻게 변천했는지, 러스크 서한이 어떤 성격의 문서인지를 순서대로 짚어야 한다. 결론만 놓고 보면 단순해 보이지만,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상당히 복잡한 외교적 경위를 담고 있다.
이야기는 1946년부터 시작된다. 일본이 패전한 직후인 1946년 1월,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SCAPIN 677호를 발령하였다. 이 지령은 일본의 통치 범위를 잠정적으로 획정한 문서로, 독도(리앙쿠르암)를 일본의 통치 범위에서 명시적으로 제외하였다. 즉 전후 처리의 출발점에서 독도는 일본 영토가 아닌 것으로 처리되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초안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1951년 8월 최종 초안이 완성되기까지 20여 차례 수정을 거쳤다. 초기 초안인 1차부터 5차까지 독도는 한국령으로 분명하게 명시되었으며, 1947년 초안에는 독도를 한국령으로 표시한 지도까지 첨부되었다. 전후 처리의 기본 방향이 SCAPIN 677호의 연장선 위에 있었고, 연합국의 공통된 인식 역시 독도를 한국 영토로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1949년 말, 결정적인 변화가 생긴다. 1949년 12월 29일 6차 초안에서 미국의 독도에 대한 태도가 180도 달라진 데는 미국 국무부 주일 정치고문 윌리엄 시볼드가 관여했다. 시볼드는 일본 측의 이해관계를 미국 정부 내부에서 대변하던 인물로, 1949년 11월 14일 전문과 11월 19일 의견서를 통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6차 초안에서 독도가 일본령으로 변경되었다. 이것이 이후 모든 혼란의 씨앗이 된다. 그러나 제6차 초안에서 유일하게 일본령으로 표기되었던 독도는 최종 조약문에서 생략되었을 뿐만 아니라, 강화조약에 대한 일본 의회의 비준 동의를 요청하는 과정에서 1951년 8월 일본 해상보안청이 제작한 '일본영역참고도'에는 독도를 한국령으로 표기하고 있는 점에서, 미국과 일본의 이해관계를 결부시킨 시볼드의 로비는 실패로 종결되었다. 다시 말해 6차 초안에서 잠깐 일본령으로 표기되었다가, 최종 조약문에서는 독도가 아예 언급되지 않는 방향으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정작 일본 정부 스스로가 의회에 조약 비준을 요청하면서 첨부한 지도에는 독도를 한국령으로 그려 넣었다.
1951년 8월 13일 완성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최종 초안은 제2조 (a)항에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그리고 청구권을 포기한다"라고 규정하였다. 독도는 이 목록에 명시되지 않았다. 일본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독도가 일본이 포기하는 영토 목록에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일본이 계속 보유하는 영토로 확인된 것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이 해석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이 논리대로라면 조약에 언급된 울릉도, 제주도 등 3~4개의 섬을 제외한 모든 섬을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조약은 일본이 포기하는 영토를 '예시'한 것이지, 그 목록에 없는 모든 것을 일본 영토로 확정한 것이 아니다. 한국의 부속 도서는 수백 개에 달하는데, 이것들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독도가 목록에 없다는 것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확정'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더욱이 영국은 "독도는 일본에서 분리되어 있고 한국 영토"라는 입장을 명확히 했으며, 이는 연합국 전체의 합의가 일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정리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 상황에서 등장하는 것이 러스크 서한이다. 한국 정부가 이에 이의를 제기하며 독도를 공식적으로 한국에 포함시켜 달라고 요청하자, 미국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 딘 러스크는 이를 거부하며 러스크 서한을 비밀리에 한국에 보냈다. 서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독도, 다른 이름으로는 다케시마 혹은 리앙쿠르암으로 불리는 그 섬에 대한 우리 정보에 따르면, 통상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이 바윗덩어리는 한국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없으며, 1905년 이래 일본 시마네현 오키도사 관할 하에 놓여 있었다. 한국은 이전에 이 섬에 대해 권리를 주장한 적이 없다." 일본이 이 러스크 서한을 '다케시마는 일본 땅'이라는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국제적 보증으로 읽으면서 오늘날의 '독도 문제'가 시작됐다. 그러나 이 서한을 법적 근거로 삼는 데에는 몇 가지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첫째, 이 서한은 조약 당사국 전체에 통보된 공식 문서가 아니다. 러스크 서한은 일본 정부에는 공개되지 않은 비밀문서로, 1978년 4월 28일자 미국의 대외관계자료로 공간된 점에서 조약의 공식 해석 문서로 볼 수 없다. 조약은 서명국 전체에 적용되는 것인데, 한국에만 비밀리에 전달된 서한이 조약의 구속력 있는 해석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둘째, 서한을 작성한 러스크의 지위 문제다. 러스크는 강화회담의 주요 미국 대표도 아니었고, 그의 견해가 미국을 대표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국무부 내부의 한 실무자가 한국 대사에게 보낸 메모에 가까운 문서 이지,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을 법적으로 확정한 문서가 아니다. 셋째, 서한의 내용 자체가 사실 오류에 기반하고 있다. 서한은 1905년 일본의 편입이 정당했다는 전제 위에서 작성되었는데, 이것은 앞서 살펴본 대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1900)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러스크 서한상의 1905년 무주지 선점 주장은 일본이 제공한 허위정보에 입각한 것 으로, 이에 대한 강화조약의 승인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국제법 법리에 대한 전형적인 왜곡에 다름 아닌 것이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일본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대한 일본 의회의 비준 동의를 요청하는 과정에서 1951년 8월 일본 해상보안청이 제작한 '일본영역참고도'를 첨부해 같은 해 10월 의회에 제출했는데, 이 지도에 독도가 한국령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일본 정부가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비준하면서 스스로의 공식 제출 문서에 독도를 한국 영토로 표기한 것이다. 조약의 의미를 가장 잘 알아야 할 당사자, 즉 일본 정부 자신이 조약의 효력이 발생하는 바로 그 시점에 독도를 한국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한 셈 이다. 일본이 나중에 러스크 서한을 근거로 "조약은 독도를 일본 영토로 확인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 자신들의 공식 문서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러스크 서한을 근거로 한 일본의 주장은 다음의 이유에서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조약 초안의 전체 흐름을 보면, 독도는 1차부터 5차까지 한국령으로 명시되었다가 시볼드의 로비로 6차에서 잠시 일본령으로 바뀌었고, 최종 조약문에서는 아예 언급되지 않는 방향으로 정리되었다. 이 흐름에서 '독도가 조약으로 일본 영토가 확정되었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초안 변천의 맥락을 역독하는 것이다. 러스크 서한은 조약의 공식 해석 문서가 아니며, 조약 서명국 전체에 통보된 적도 없고, 작성자가 조약의 대표 협상자도 아니었으며, 내용 자체가 잘못된 전제 위에 서 있다. 그리고 일본 정부 스스로가 의회 비준 과정에서 독도를 한국 영토로 표기한 지도를 제출하였다.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하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러스크 서한을 통한 일본의 주장은 조약 전체의 맥락을 선택적으로 독해하고, 비공식 문서 하나를 과도하게 확대 해석한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독도 논쟁에서 ICJ 제소 문제는 법리적 쟁점인 동시에 외교적 전략의 문제다. 일본은 반복적으로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자고 제안하고, 한국은 매번 이를 거부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일본은 법적 해결을 원하고 한국은 이를 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본은 바로 이 구도를 의도적으로 연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세 가지를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 ICJ가 어떤 기관이고 어떻게 관할권이 성립하는지, 일본의 제소 제안이 실제로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한국이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다.
국제사법재판소는 국내 법원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국내 재판에서는 원고가 소송을 제기하면 피고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재판에 응해야 한다. 그러나 ICJ는 다르다. ICJ에 국가 간의 특정 분쟁을 제소하려면 당사국들이 모두 동의해야 한다. 한쪽이 아무리 재판을 원해도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으면 재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관할권이 성립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분쟁 당사국이 특별 협정을 맺어 함께 ICJ에 사건을 가져오는 방식이다. 둘째는 ICJ 규정 제36조 2항에 따른 선택조항 수락이다. 선택조항을 수락한 국가 상호 간에는 ICJ의 강제관할권 행사가 인정된다. 즉 두 나라가 모두 이 조항을 수락해 놓으면, 한쪽이 제소했을 때 상대방의 별도 동의 없이도 재판이 시작될 수 있다. 일본과 달리 한국은 이 선택조항을 수락하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 정부가 합의·동의하지 않는 한 독도 문제로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심판을 받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결론적으로, 일본이 단독으로 독도 문제를 ICJ에 제소하는 것은 현재의 법적 구조상 불가능하다. 일본의 제소 제안은 실현 가능한 법적 절차의 제안이 아니라, 한국의 거부 반응을 유도하기 위한 외교적 행위에 가깝다.
일본은 1954년 이래 지금까지 수차례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해결할 것을 한국에 제의해 왔다. 1954년 9월 외교상의 구상서를 보내 독도 영유권에 관한 분쟁을 ICJ에 회부할 것을 제안했으나 같은 해 10월 한국은 이를 거부했다. 1962년 3월 한일 외무장관 회담 때도 고사카 외무대신이 최덕신 외무부 장관에게 ICJ 회부를 제안했으나 한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당시에도 일본은 ICJ 제소를 거론하며 압박했다. 이 반복적인 제안의 패턴에는 일본의 전략적 의도가 담겨 있다. 일본이 독도 문제와 관련해 ICJ를 틈날 때마다 거론하는 것은 '독도=분쟁 지역'이라는 인상을 국제사회에 확산하려는 노림수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이것이 핵심이다. 일본은 ICJ에서 실제로 이기려는 것보다, 독도가 '분쟁 중인 섬'이라는 인식을 국제사회에 심는 것 자체를 목표로 삼는다. 제안을 반복하고 한국이 거부하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한국이 마치 법적 판단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한국 정부의 거부는 단순히 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 아니다. 거부의 논거는 명확한 법적 원칙 위에 있다. 한국 정부는 독도는 역사적 및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한국의 고유영토라는 입장에서, 한일 양국 간에 독도 분쟁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는 기본 입장을 시종 고수하고 있다. 이 논리의 구조는 이렇다. 현재 독도는 한국이 실효지배하고 있다. 영토를 실효지배하는 국가는 국제법상 그 지위를 안정적으로 보유한다. 영토 분쟁을 국제재판에 가져가는 것은 현상을 바꾸려는 쪽, 즉 도전자가 하는 일 이다. 현상을 유지하는 쪽이 먼저 재판을 요청할 이유가 없다. 한국이 ICJ 회부에 응한다는 것은 독도의 귀속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묵시적으로 인정하는 셈 이 된다. 이것은 한국의 법적 지위를 스스로 약화시키는 행위다. 1954년 한국 정부가 일본의 제안에 대해 전달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일본 정부의 제의는 사법절차를 가장한 또 다른 허위의 시도에 불과하다. 한국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갖고 있으며, 한국이 국제재판소에서 이 권리를 증명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 입장은 7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 정부의 기본 논리로 유지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역설이 하나 있다. 일본은 ICJ 제소를 통한 '법의 지배'를 강조하지만, 정작 일본이 ICJ 판결을 무시한 사례가 있다. 일본은 그동안 독도 문제를 놓고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판가름을 내자"라고 꾸준히 주장해 왔는데, 그런 일본이 스스로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을 어기면서까지 포경(고래 사냥)을 강행했다. ICJ 판결도 강제 집행력이 없기 때문에 일본이 이를 무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의 ICJ 제소 제안이 '법의 지배'에 대한 진정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ICJ를 편의적으로 활용하되, 불리한 판결은 무시하는 태도 가 이미 선례로 남아 있다. 또한 앞서 살펴본 대로, 일본의 독도 주장 자체가 고유영토설과 편입론 사이에서 내적 모순을 안고 있다. 러스크 서한의 근거 역시 잘못된 사실 전제 위에 서 있다. 일본이 진정으로 자국의 법적 논거에 확신이 있다면, 왜 한국에 동의를 요청하는 방식으로만 제소 제안을 반복하고 실제로는 단독 제소를 시도하지 않는가 . 일본이 제기한 ICJ 제소 시도의 궁극적인 의도는 임의 관할을 원칙으로 하는 ICJ에 대한 제소 관철 및 승소를 위한 고도화된 전략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매우 낮지만, 만약 독도 문제가 ICJ로 가게 된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 이것을 검토하는 것 자체가 한국의 법적 논거를 점검하는 데 의미가 있다. 실제로 만에 하나 독도가 국제사법재판소에 올라갈 경우, 한국의 완벽한 승리를 장담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국제적 역학 관계에서 한국이 일본에 많이 뒤처지는 데다 한국은 국제사법재판소 소송 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제사법재판소 재판은 한 번 패소하면 다시 제소할 수도 없다. 법적 논거의 우열이 재판 결과를 자동으로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국제재판에서는 소송 전략, 증거 제출 방식, 법리 구성의 정교함, 외교적 영향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한국이 칙령 제41호, 태정관 지령,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초안 변천 과정 등 유리한 증거를 얼마나 체계적으로 구성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다.
ICJ 제소 문제는 독도의 법적 귀속을 가리기 위한 순수한 법적 제안이 아니다. 일본의 전략적 핵심은 제소 그 자체가 아니라, 제소 제안과 한국의 거부라는 구도를 반복적으로 연출함으로써 독도를 '분쟁 지역'으로 국제적으로 각인시키는 데 있다. 한국의 거부는 법적 자신감의 결여가 아니라, 실효지배 국가가 현상 변경을 원하는 상대방의 요구에 응할 이유가 없다는 국제법 원칙에 근거한다. 재판에 응하는 것 자체가 지위를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이 한국이 법적 논거를 정교하게 갈고닦을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국제 정세는 변하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관할권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다. 법적 논거의 우위를 확보해두는 것과, 그 논거를 재판정에서 실제로 펼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한국에게 필요한 것은 거부의 자신감과 함께, 언제든 법정에서도 논거를 펼칠 수 있는 준비를 병행하는 것이다.